221년 BC 진시황의 중국 통일: 만리장성과 분서갱유가 만든 영원한 제국의 꿈

서론: 한 사람의 야망이 만든 영원한 체제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嬴政)이 마지막 경쟁국인 제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그는 단순히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순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될 정치 체제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2,000년 이상 중국은 분열과 통일을 반복했지만, 통일 제국이라는 이상은 한 번도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이 통치한 기간은 불과 15년(221-210 BC)에 불과했고, 진나라도 그의 죽음 4년 후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불멸입니다.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군현제, 만리장성 등 그의 개혁은 중국 문명의 DNA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14억 중국인이 한자를 쓰고, 단일 국가 정체성을 가지며, 중앙집권적 통치를 당연시하는 것은 모두 진시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통일의 영웅이자 폭군, 개혁가이자 파괴자, 합리주의자이자 미신에 사로잡힌 독재자였습니다. 분서갱유로 지식인을 탄압했지만 법치를 확립했고, 수백만을 죽였지만 더 큰 혼란을 끝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까지 중국 정치사상의 핵심 딜레마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21세기 중국의 부상과 함께 진시황의 유산은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중국몽(中國夢)’을 추구하는 현대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 제국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일대일로’는 진시황의 도로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2,200년 전의 통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정치적 이상인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의 개혁이 무엇을 바꾸었으며, 왜 이 사건이 동아시아 문명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전국시대의 혼란: 통일의 전제조건

춘추전국시대의 경쟁과 발전

기원전 770년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이후, 중국은 550년간 분열 상태였습니다. 춘추시대(770-476 BC)에는 100여 개국이, 전국시대(475-221 BC)에는 7웅(秦楚燕韓趙魏齊)이 패권을 다퉜습니다. 이 시대는 혼란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문명 발전의 황금기였습니다.

철기 사용이 보편화되어 농업 생산력이 증가했고, 상업이 발달하여 화폐 경제가 확산되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했습니다. 각국은 부국강병을 위해 개혁 경쟁을 벌였고, 이는 제도와 기술의 혁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제자백가: 사상의 황금시대

전국시대는 중국 사상사의 정점이었습니다. 공자의 유가, 노자의 도가, 묵자의 묵가, 한비자의 법가, 손자의 병가 등 제자백가가 경쟁했습니다. 이들은 혼란을 극복하고 이상 사회를 실현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법가사상은 진나라 부강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상앙, 신불해, 한비자로 이어지는 법가는 엄격한 법치, 신상필벌, 중앙집권을 주장했습니다. “법 앞에 만민평등”이라는 법가의 원칙은 혁명적이었고, 이는 진시황 통치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진나라의 부상

진나라는 원래 중국 서쪽 변방의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이점이 되었습니다. 구습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개혁이 가능했고, 서융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강한 군대를 보유했습니다.

기원전 361년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를 변화시켰습니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도입했으며, 토지 사유제를 인정하고, 군공에 따라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이는 구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농민과 병사들에게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영정: 최초의 황제가 되다

소년왕의 등극

기원전 259년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태어난 영정은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인질이었기 때문에 그도 9세까지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깊은 불안감과 동시에 강한 생존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기원전 247년 13세에 진왕이 되었지만, 실권은 상국 여불위가 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노애의 불륜 사건, 여불위와의 권력 투쟁을 거쳐 22세(238 BC)에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권력의 본질을 체득했습니다.

이사와 법가 통치

영정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는 이사(李斯)였습니다. 초나라 출신의 이 법가 사상가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천하를 통일하라”고 진언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라(遠交近攻).

이사는 법가 이론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엄격한 법 집행, 효율적인 관료제, 정보 통제를 통해 국가 권력을 극대화했습니다. 또한 각국의 인재를 영입하여 진나라를 강화했습니다. 수로 건설가 정국, 군사 전략가 위료 등이 대표적입니다.

10년 통일 전쟁

기원전 230년 한나라 멸망을 시작으로 10년간의 통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진나라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외교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6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고, 철제 무기와 노(弩)로 무장했습니다.

각개격파 전략이 효과적이었습니다. 230년 한, 228년 조, 225년 위, 223년 초, 222년 연, 221년 제나라가 차례로 멸망했습니다. 왕전, 왕분, 몽염 등 뛰어난 장군들이 활약했고, 뇌물과 이간책도 동원되었습니다.

혁명적 개혁: 새로운 중국의 탄생

황제 제도의 창설

기원전 221년, 영정은 삼황오제에서 따온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시황제(始皇帝), 후계자를 이세, 삼세로 부르며 만세일계를 꿈꿨습니다. 이는 단순한 왕을 넘어선 신성한 통치자 개념이었습니다.

황제는 천자(天子)로서 하늘의 위임(天命)을 받아 통치한다는 이념이 확립되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었고, 황제의 명령은 조서(詔書)가 되어 법적 효력을 가졌습니다. 이 제도는 1912년까지 2,13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군현제: 중앙집권의 확립

진시황은 전국을 36군(후에 48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을 두는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각 군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통치했고, 정기적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이는 봉건제를 완전히 대체한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군현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중앙의 명령이 신속히 전달되고, 세금과 부역이 체계적으로 징수되었습니다. 지방 세력의 할거를 방지하고, 통일 국가의 일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중국 행정 체제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문자와 도량형 통일

진시황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문자 통일입니다. 각국마다 다른 문자를 소전(小篆)으로 통일했습니다. 이사가 주도한 이 사업은 3,300자를 표준화했습니다. 이로써 중국 전역에서 문서 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도량형 통일도 혁명적이었습니다. 길이(척), 무게(근), 부피(승) 단위를 통일하고, 표준 기구를 제작하여 배포했습니다. 화폐도 원형 방공전(圓形方孔錢)으로 통일했습니다. 심지어 수레바퀴 간격도 6척으로 통일하여 전국 도로를 표준화했습니다.

만리장성: 제국의 상징

북방 장성의 연결

진시황은 기존 각국의 장성을 연결하고 확장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했습니다. 서쪽 감숙성에서 동쪽 요동까지 5,000km(1만 리)에 달하는 거대한 방벽이었습니다. 몽염 장군이 30만 군대와 수십만 민부를 동원하여 10년간 공사했습니다.

만리장성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이었고, 중화 세계의 범위를 확정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통일 제국의 힘을 과시하는 기념물이었습니다.

인명 피해와 맹강녀 전설

만리장성 건설로 수십만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혹독한 노동, 열악한 환경, 부족한 보급이 원인이었습니다. 맹강녀가 장성 공사에 끌려간 남편을 찾아가 통곡하자 장성이 무너졌다는 전설은 민중의 고통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습니다. 이후 2,000년간 중국의 방패가 되었고, 한족 문명을 보호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이자 중국의 상징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분서갱유: 사상 통일의 비극

학술 논쟁에서 탄압으로

기원전 213년, 박사 순우월이 군현제를 비판하고 고제(古制) 복귀를 주장했습니다. 이사는 이를 반박하며 “옛것을 들어 지금을 비방하는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여 분서령을 내렸습니다.

진나라 역사서, 의학, 농업, 점술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특히 시경, 서경, 제자백가의 저작이 표적이었습니다. 개인 소장 도서는 30일 내에 관청에 제출해야 했고, 위반자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460명 유생의 참극

기원전 212년, 더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방사들의 사기 사건에 분노한 진시황은 유생들을 체포했습니다. 460명(일설 460여 명)이 함양에서 생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악명 높은 갱유(坑儒) 사건입니다.

분서갱유는 중국 지식사의 대참사였습니다. 수많은 고전이 소실되었고, 지식 전승이 단절되었습니다. 한나라 때 복원 노력이 있었지만, 많은 문헌이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이는 진시황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사상 통제의 역설

진시황은 사상 통일을 통해 제국의 안정을 추구했지만, 오히려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지식인들은 진나라를 증오했고, 이는 진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나라는 유가를 국교로 삼아 지식인을 포섭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분서갱유는 중국 정치 문화의 한 패턴이 되었습니다. 역대 왕조들은 위기 시 사상 통제를 시도했고, 문자의 옥, 문화대혁명까지 이어졌습니다. 통일과 다양성 사이의 긴장은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불로불사의 꿈과 몰락

불로초를 찾아서

진시황은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수차례 암살 위협을 겪은 그는 불로불사에 집착했습니다. 방사 서복에게 동남동녀 3,000명을 주어 봉래산으로 불로초를 찾으러 보냈습니다(일부는 일본에 도착했다고 주장).

수은을 불로장생약으로 복용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건강을 해쳤을 것입니다. 전국을 순행하며 태산 봉선을 거행하고, 각지의 명산대천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는 천명을 확인하고 영생을 구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거대한 지하 제국

1974년 발견된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8,000개의 실물 크기 병사, 130대의 전차, 670필의 말이 지하 군대를 구성합니다. 각 병사의 얼굴이 다르고, 실제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진시황릉 자체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지하 궁전에는 수은으로 만든 강과 바다, 천체를 모방한 천장, 자동 발사되는 쇠뇌가 있다고 합니다. 70만 명이 40년간 건설한 이 지하 제국은 그의 영생에 대한 집착을 보여줍니다.

급작스런 죽음과 제국의 붕괴

기원전 210년, 다섯 번째 순행 중 진시황은 사구(지금의 하북성)에서 급사했습니다. 향년 49세였습니다. 환관 조고와 이사는 죽음을 숨기고 유조를 조작하여 장자 부소를 자살하게 하고 무능한 차남 호해를 즉위시켰습니다.

이세황제 호해는 조고에게 조종당하며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건국 15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진시황의 만세일계 꿈은 3대로 끝났습니다.

한나라의 계승과 수정

진의 제도, 한의 정신

한 고조 유방은 진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진시황의 제도는 대부분 계승했습니다. 군현제,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한이 진을 계승했다(漢承秦制)”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만 한나라는 진나라의 가혹함을 완화했습니다. 유가를 국교로 삼아 덕치를 강조했고, 황제권을 일정 부분 제한했습니다. 법가의 효율성과 유가의 도덕성을 결합한 것입니다. 이 절충주의가 한나라 400년 지속의 비결이었습니다.

통일 제국 이념의 확립

한나라는 진시황이 시작한 통일 제국을 완성했습니다. 한 무제 시대 영토는 진나라의 두 배가 되었고,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연결되었습니다. ‘한족(漢族)’, ‘한자(漢字)’ 등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명칭이 이때 확립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일이 중국인의 정치적 이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분열은 일시적이고 통일이 정상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왕조가 흥망했지만, 모두 진시황의 통일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역사적 평가: 폭군인가 영웅인가

전통적 비판

사마천의 『사기』부터 진시황은 폭군의 대명사였습니다. 유가 사학자들은 그를 무도한 독재자로 묘사했습니다. 분서갱유, 아방궁 건설, 가혹한 형벌, 무리한 토목공사가 주요 비판 대상이었습니다.

“진나라는 인(仁)을 잃어 천하를 잃었다”는 것이 전통적 평가였습니다. 진시황은 반면교사로서 후대 황제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제도는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현대적 재평가

20세기 들어 진시황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통일을 이룬 혁명가로 본 것입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에서 진시황은 진보적 법가로 추앙받았습니다.

현대 중국 역사학계는 보다 균형잡힌 평가를 추구합니다. 진시황의 통일이 중국 문명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의 폭력성과 인명 피해를 간과하지 않습니다. 그는 위대한 통일자이자 잔혹한 독재자였다는 복합적 평가가 주류입니다.

21세기 중국과 진시황의 유산

신중국의 진시황 콤플렉스

현대 중국 지도자들은 모두 진시황의 그림자 아래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진시황과 비교했고, 덩샤오핑 이후 지도자들도 통일과 부강을 최고 가치로 삼습니다. 시진핑의 ‘중국몽’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도 진시황의 통일 제국을 연상시킵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는 진시황의 도로 건설과 유사합니다. 디지털 위안화는 화폐 통일의 현대판이고, 사회신용시스템은 법가적 통치의 21세기 버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시황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통일과 다양성의 딜레마

중국은 여전히 진시황이 제기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56개 민족의 다양성과 단일 국가 정체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홍콩, 대만, 신장, 티베트 문제는 모두 이 딜레마의 현재형입니다.

언어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준중국어(普通話) 보급은 진시황의 문자 통일 정신을 계승하지만, 방언과 소수민족 언어의 소멸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통일과 다양성의 균형은 영원한 과제입니다.

세계사적 의미

진시황의 통일은 세계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유럽이 로마 제국 붕괴 후 영구 분열한 것과 달리, 중국은 통일 제국을 반복적으로 재건했습니다. 이는 왜일까? 진시황이 만든 제도적, 문화적 통합이 그 답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로 부상한 것도 이 통일성 덕분입니다. 14억 인구가 단일 정치체제 아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입니다. EU가 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결론: 영원한 제국의 꿈과 현실

기원전 221년, 진왕 영정이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지속적인 정치 체제를 창조했습니다. 비록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지만, 진시황이 만든 틀은 2,000년 이상 중국 문명을 규정했습니다. 황제 제도, 중앙집권, 문자 통일, 표준화된 행정 체계는 모두 그의 유산입니다.

진시황은 극단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수백만을 죽이고도 더 큰 혼란을 끝냈다고 자부했고, 책을 불태우면서도 문자를 통일했으며, 폭정을 행하면서도 법치를 확립했습니다.

분서갱유는 문명의 파괴였지만, 문자 통일은 문명의 보존이었습니다. 만리장성 건설로 수십만이 죽었지만, 그것은 수천만을 보호하는 방벽이 되었습니다. 가혹한 법치는 억압이었지만, 동시에 전국시대의 무질서를 종식시켰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양면성을 단순한 선악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진시황의 개혁이 단순한 정치적 통일을 넘어 문명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문자를 쓰고, 같은 도량형을 사용하며, 같은 법률 아래 사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중국이 수차례 분열했음에도 항상 재통일될 수 있었던 근본 이유입니다.

진시황의 유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일당 통치, 강력한 중앙정부, 표준어 정책,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등은 모두 진시황 모델의 현대적 변형입니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진시황 특색 근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의 모델은 도전받고 있기도 합니다. 정보화 시대에 분서갱유식 통제는 가능한가? 세계화 시대에 만리장성식 고립은 지속가능한가?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편 가치가 된 시대에 법가식 통치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이는 현대 중국이 직면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진시황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아마도 이것일 것입니다: 거대한 비전과 강력한 실행력은 역사를 바꿀 수 있지만, 인간성을 무시한 체제는 지속되기 어렵다. 진나라가 단명한 것은 법가의 효율성만 추구하고 인간의 정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가 400년 지속한 것은 진의 제도에 유가의 인간성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시황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통일과 다양성, 효율과 자유, 질서와 창의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거대한 정치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가? 문명의 통합과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2,200년 전 진시황이 만든 체제는 인류가 시도한 가장 야심찬 정치 실험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성공했고 부분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통일 제국의 꿈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희생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줍니다.

진시황은 육체적 불멸을 추구했지만 49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불멸을 얻었습니다. 그가 만든 체제와 이념은 2,0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오늘날 14억 중국인의 삶을 여전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진시황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시황의 이야기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영원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액튼 경의 경고는 2,200년 전에도 유효했습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만물을 지배했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주는 최고의 아이러니이자 가장 심오한 교훈일 것입니다.

FAQ

Q1: 진시황이 정말로 분서갱유로 460명을 생매장했나요? 이것은 과장된 것 아닌가요?

A1: 분서갱유의 규모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460여 명 생매장을 기록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한나라 시대의 과장이라고 주장합니다. ‘갱(坑)’이 생매장이 아니라 처형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서(책 태우기)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진시황 34년(기원전 213년)의 법령은 명확히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 많은 고전이 소실되었습니다. 한나라 초기 고전 복원 사업의 존재 자체가 분서의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숫자보다 사상 통제 자체입니다. 설령 460명이 과장이라 해도, 지식인 탄압과 사상 통일 시도는 명백했습니다. 이것이 진시황의 가장 큰 오점이며, 후세가 그를 폭군으로 기억하는 주요 이유입니다.

Q2: 중국은 왜 로마제국처럼 영구 분열하지 않고 계속 통일을 이루었나요?

A2: 이는 비교사학의 핵심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진시황의 문자 통일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유럽은 라틴어가 각 지역 언어로 분화했지만, 중국은 한자라는 공통 문자를 유지했습니다. 방언이 달라도 문자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전통입니다.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이 제국 전체에서 순환 근무하며 통일성을 유지했습니다. 로마는 지방 귀족에 의존했지만, 중국은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했습니다.

셋째, 통일 이념의 힘입니다. ‘천하통일’은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이 되었고, 분열은 일시적 혼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반면 유럽은 다수 왕국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넷째, 지리적 요인도 있습니다. 중국 핵심부(화북평원과 장강 유역)는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유럽은 산맥과 해협으로 자연 분할되어 있습니다.

Q3: 진시황릉은 왜 아직도 발굴하지 않나요? 정말 수은 강과 바다가 있나요?

A3: 진시황릉 본체를 발굴하지 않는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기술적 문제가 가장 큽니다. 현재 기술로는 발굴 시 유물 보존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병마용 발굴 초기, 채색된 병사들이 공기 접촉 후 수분 만에 색이 바랬던 경험이 있습니다. 2,200년 된 유기물 유물들을 온전히 보존할 기술이 아직 부족합니다.

수은 문제도 심각합니다. 실제로 릉 주변 토양에서 높은 수은 농도가 검출되었습니다.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량의 수은은 발굴 인원과 주변 환경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보호 철학도 바뀌었습니다. “발굴도 일종의 파괴”라는 인식하에, 후세를 위해 보존하자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중국 정부는 “100년은 기다릴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정치적 고려도 있습니다. 진시황릉은 중국의 상징입니다. 섣부른 발굴로 손상된다면 국가적 치욕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미발굴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관광과 상상력 자극에 더 유리하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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