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와 핵 시대의 도덕적 딜레마

서론: 인류가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날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에서 섬광이 번쩍였습니다. 그 순간 도시 중심부의 온도는 태양 표면보다 뜨거운 섭씨 100만 도에 달했고, 반경 2km 내의 모든 것이 증발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력이 무기로 사용된 순간이었습니다.

‘리틀 보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이 폭탄은 단 하나로 7만 명을 즉사시켰고, 연말까지 1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3일 후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 맨’은 추가로 7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 두 발의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지만, 동시에 인류를 전혀 새로운 시대로 밀어넣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첫 핵실험을 목격하며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 되었다,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 인식이었습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히로시마는 과학기술의 정점인 동시에 인간성의 나락이었습니다. 전쟁 종결과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정당화와,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비난이 75년 넘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과학의 책임, 전쟁의 윤리, 권력의 한계에 대한 영원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 글에서는 원자폭탄이 어떻게 개발되고 사용되었는지, 그것이 가져온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결과는 무엇인지, 그리고 핵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이 전쟁의 도구가 되다

아인슈타인의 편지와 프로젝트의 시작

1939년 8월 2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치 독일이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을 경고하며 미국도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이 이런 편지를 쓴 것은 나치의 위협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1942년 12월, 엔리코 페르미가 시카고 대학에서 최초의 핵 연쇄반응을 성공시켰습니다. 이론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즉시 대규모 프로젝트를 승인했고,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총책임자로, 오펜하이머가 과학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로스앨러모스: 비밀 도시의 탄생

뉴멕시코 사막에 건설된 로스앨러모스는 지도에도 없는 비밀 도시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였습니다. 오펜하이머, 페르미,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리처드 파인만 등 20세기 물리학을 이끈 천재들이 한 곳에 집결했습니다.

3년간 13만 명이 참여하고 20억 달러(현재 가치 280억 달러)가 투입되었습니다. 오크리지에서 우라늄을 농축하고, 핸포드에서 플루토늄을 생산했습니다. 이는 당시 미국 자동차 산업 전체와 맞먹는 규모였습니다.

트리니티 실험: 새로운 시대의 여명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뉴멕시코 앨러모고도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핵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코드명 ‘트리니티’였습니다. 20킬로톤의 위력으로 사막에 거대한 유리 크레이터를 만들었습니다.

목격자들은 경외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케네스 베인브리지는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브스는 즉시 트루먼 대통령(루스벨트는 4월에 사망)에게 성공을 보고했습니다. 포츠담 회담 중이던 트루먼은 이 소식으로 소련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의 순간: 왜 히로시마였나

일본의 항복 거부

1945년 여름, 일본의 패배는 명백했습니다. 해군과 공군은 궤멸되었고, 본토는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지도부는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본토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묵살”로 대응했습니다. 군부는 천황제 유지를 위해 끝까지 싸울 태세였습니다. 민간인들도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다운폴 작전과 예상 희생자

원폭 대안은 일본 본토 침공이었습니다. ‘다운폴 작전’은 11월 규슈 상륙(올림픽 작전)과 1946년 3월 간토 평야 상륙(코로넷 작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미군은 100만 명의 사상자를 예상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의 경험이 근거였습니다. 82일간의 전투에서 미군 5만, 일본군 10만, 민간인 10만이 희생되었습니다. 본토에서는 이보다 훨씬 큰 희생이 예상되었습니다. 일본 측 예상 사상자는 수백만에서 천만까지 추정되었습니다.

트루먼의 결정

트루먼은 부통령으로 82일만 재임 후 대통령이 되었고, 그때서야 원폭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그는 원폭 사용을 결정하며 “가장 어려운 결정”이라고 일기에 썼습니다. 그러나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목표 선정 위원회는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를 후보로 검토했습니다. 교토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스팀슨 육군장관이 제외시켰습니다. 히로시마는 군사 시설이 있고 지형이 폭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 선택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지옥의 아침

에놀라 게이의 비행

8월 6일 오전 2시 45분, 폴 티베츠 대령이 조종하는 B-29 ‘에놀라 게이’가 티니안 섬을 이륙했습니다. 폭탄 무게는 4.4톤, 우라늄 235는 64kg이었습니다. 6시간 비행 후 히로시마 상공에 도달했습니다.

오전 8시 15분 17초, 고도 9,600미터에서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습니다. 43초 후 지상 580미터에서 폭발했습니다. 티베츠는 “강렬한 빛 다음 거대한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고 보고했습니다.

섬광과 열폭풍

폭발 순간 화구 온도는 100만 도를 넘었습니다. 1km 내의 사람들은 즉시 탄화되었습니다. 열선은 3.5km까지 3도 화상을 입혔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흰 옷보다 더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폭풍은 폭심지에서 시속 1,000km로 퍼져나갔습니다. 2km 내의 목조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콘크리트 건물도 골격만 남았습니다. 폭심지 근처의 압력은 평방미터당 35톤에 달했습니다.

흑い雨와 방사능

폭발 20분 후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사성 물질을 포함한 이 비는 2차 피폭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마름에 이 비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즉사자는 7만 명, 부상자는 7만 명이었습니다. 도시 인구 35만 명 중 절반이 즉각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의사 90%, 간호사 93%가 죽거나 부상당해 의료 체계가 붕괴했습니다.

피폭자들의 증언: 살아있는 지옥

생존자들의 기억

6세에 피폭된 사사키 사다코는 “하늘이 갑자기 주황색으로 변했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녀는 10년 후 백혈병으로 죽기 전 천 마리 종이학을 접었고, 이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의사 하치야 미치히코는 일기에 썼습니다: “살가죽이 너덜너덜 매달린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그들은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는데, 매달린 살가죽이 아프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방사선 병

많은 생존자가 며칠 후 갑자기 죽기 시작했습니다. 탈모, 출혈, 고열, 설사 등 방사선 병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의사들은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원폭증”이라는 새로운 병이었습니다.

8월 말까지 사망자는 9만 명, 연말까지 14만 명에 달했습니다. 5년 내 2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암, 백혈병, 기형아 출산 등 장기 영향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나가사키와 일본의 항복

8월 9일: 두 번째 원폭

8월 9일, 당초 목표였던 고쿠라가 구름에 가려 나가사키로 변경되었습니다.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은 21킬로톤의 위력으로 7만 명을 죽였습니다. 지형 때문에 피해는 히로시마보다 적었지만 여전히 참혹했습니다.

같은 날 소련이 대일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붕괴했습니다. 일본은 이중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여전히 항전을 주장했습니다.

성단: 천황의 결단

8월 14일 심야 회의에서 각료들은 의견이 갈렸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국민의 고통을 볼 수 없다. 종전을 결정한다.” 이는 천황이 직접 정치적 결정을 내린 드문 사례였습니다.

8월 15일 정오, 천황의 육성 방송(옥음방송)이 송출되었습니다. 많은 일본인이 처음 듣는 천황의 목소리였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라는 구절은 유명해졌습니다.

핵 시대의 개막: 공포의 균형

소련의 핵개발과 군비 경쟁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원폭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미국의 핵 독점은 4년 만에 끝났습니다. 클라우스 푹스 등 스파이들이 정보를 넘겼지만, 소련도 독자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1952년 미국이 수소폭탄을, 1953년 소련이 뒤따랐습니다. 메가톤급 무기가 등장했습니다. 1961년 소련의 ‘차르 봄바’는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의 3,300배 위력이었습니다.

상호확증파괴(MAD)

냉전 시대 핵 전략의 핵심은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였습니다. 선제공격을 해도 상대의 보복으로 공멸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공포가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13일간 세계는 종말의 문턱에 섰습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가까스로 타협했지만, 인류가 얼마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핵확산과 통제 노력

영국(1952), 프랑스(1960), 중국(1964)이 핵보유국이 되었습니다.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체결되었지만,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습니다.

현재 9개국이 13,000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중 수천 개가 즉각 발사 가능한 상태입니다. 핵 시계는 자정(핵전쟁)까지 90초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도덕적 논쟁: 정당화와 비판

원폭 투하 정당화 논리

지지자들은 원폭이 전쟁을 조기 종결시켜 더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주장합니다. 본토 침공 시 미군 100만, 일본인 수백만이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근거입니다. 또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응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쟁 종결 후 소련의 팽창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고 봅니다. 스탈린이 동아시아에서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 것입니다. 냉전의 시작이었지만 필요악이었다는 견해입니다.

비판과 대안

비판자들은 일본이 이미 항복 직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해상 봉쇄와 재래식 폭격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천황제 유지를 보장했다면 더 일찍 항복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전쟁 범죄라는 비판도 강합니다. 히로시마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습니다. 무차별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역사가들의 재평가

최근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더 복잡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일본 지도부가 소련 중재를 기대했고, 소련 참전이 항복의 더 큰 요인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원폭은 미국 국내용 명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트루먼 자신도 양가감정을 가졌습니다. 그는 나가사키 후 추가 원폭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또 다른 10만 명, 특히 어린이들을 죽이는 것은 너무 끔찍하다”고 말했습니다.

피폭자와 기억의 정치

히바쿠샤의 증언 운동

피폭 생존자(히바쿠샤)들은 침묵에서 벗어나 증언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조직화되어 핵폭발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핵무기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201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ICAN(핵무기폐기국제캠페인)에는 히바쿠샤들이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사츠마 세츠코는 수상 연설에서 “핵무기는 필요악이 아니라 절대악”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평화 기념관과 교육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은 연간 150만 명이 방문합니다. 원폭 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은 핵무기의 참상을 교육하는 장소이자 평화를 기원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억의 정치는 복잡합니다. 일본의 피해자 의식과 가해자로서의 책임 회피 비판이 공존합니다. 난징 대학살, 위안부 문제와 원폭 피해를 어떻게 균형 있게 기억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핵의 평화적 이용: 양날의 검

원자력 발전의 확산

1953년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연설 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시작되었습니다. 1954년 소련이 최초의 상업용 원전을 가동했고, 현재 전 세계 440여 개 원전이 운영 중입니다.

원자력은 탄소 배출 없는 에너지원으로 기후변화 대응에 중요합니다. 프랑스는 전력의 70%를 원자력으로 생산합니다. 그러나 안전성과 핵폐기물 문제는 여전히 논란입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1986년 체르노빌, 2011년 후쿠시마 사고는 원자력의 위험을 상기시켰습니다. 체르노빌은 30명이 즉사했지만, 장기 영향으로 수천-수만 명이 암으로 죽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고들은 원자력에 대한 공포를 되살렸습니다. 독일은 2022년 탈원전을 완료했고, 많은 국가가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여전히 강합니다.

21세기의 핵 위협

북한과 이란

북한은 2006년부터 6차례 핵실험을 했습니다. ICBM 개발로 미국 본토도 사정권에 들었습니다. 김정은 체제의 핵무기는 체제 생존 수단이자 협상 카드입니다.

이란 핵 합의(JCPOA)는 2015년 체결되었지만 2018년 트럼프가 탈퇴하면서 위기가 재발했습니다. 이란의 우라늄 농축은 계속되고 있고, 중동 핵 도미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핵 테러리즘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위협은 핵 테러입니다. 구소련의 핵물질 유출, 파키스탄의 불안정성은 테러집단의 핵 획득 가능성을 높입니다. “더러운 폭탄”(방사능 폭탄)은 더 현실적인 위협입니다.

핵 안보 정상회의가 2010년부터 열렸지만, 국제 협력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핵물질 밀매 적발 건수는 연간 수백 건에 달합니다. 한 번의 실패가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신냉전과 핵 현대화

미중 대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핵 위협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푸틴은 핵무기 사용을 암시했고, 중국은 핵전력을 증강하고 있습니다. INF 조약 폐기로 중거리 미사일 경쟁이 재개되었습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모두 핵무기 현대화에 조 단위 달러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극초음속 미사일, 저위력 핵무기 등 새로운 무기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핵전쟁 위험이 냉전 이후 최고 수준입니다.

결론: 영원한 경고, 끝나지 않은 과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습니다. 원자핵 분열의 에너지를 해방시킨 순간, 우리는 신의 영역에 발을 들였고 동시에 자기 파멸의 가능성을 안게 되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재는 인류 문명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영원한 경고로 남아있습니다.

75년이 지난 지금, 핵무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국가가 핵을 보유하고, 더 정교한 무기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냉전의 종식은 핵 위협의 종식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행위자, 새로운 기술, 새로운 갈등이 핵 시대의 위험을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절망만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피폭자들의 증언, 평화 운동, 군축 노력은 희망의 씨앗입니다. 2017년 UN 핵무기금지조약 채택은 작은 진전이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입니다. 젊은 세대가 핵 없는 세계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핵 시대의 역설은 파괴의 기술이 평화를 강제한다는 것입니다. 상호확증파괴의 공포가 대전쟁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정한 평화입니다. 실수, 오판, 기술 결함 하나가 문명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모클레스의 검 아래 살고 있습니다.

원자폭탄은 과학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E=mc²라는 우아한 방정식이 대량 살상 무기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최악의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신화는 히로시마에서 산산조각났습니다. 과학자들도 자신의 연구가 가져올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히로시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같은 종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것도 추상적 이념이나 국가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진화의 실수인가, 아니면 극복해야 할 도전인가?

오펜하이머는 말년에 “물리학자들은 죄를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물리학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핵무기를 만들고, 사용하고, 보유하는 것은 집단적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가 공모자이자 잠재적 희생자입니다.

21세기의 과제는 명확합니다.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핵무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거나. 전자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후자는 위험하지만 불가피해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 히로시마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매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서는 평화의 종이 울립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자, 산 자를 위한 경종입니다. 그 종소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히로시마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우리는 또 다른 히로시마를 막을 수 있는가?

답은 우리 손에 있습니다. 핵 시대를 끝내는 것은 핵무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를 필요로 하는 세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을 악마화하지 않고, 차이를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으며, 안보를 상호 파멸이 아닌 상호 협력에서 찾는 것입니다.

히로시마의 유산은 파괴된 도시가 아니라 재건된 도시입니다. 증오가 아니라 화해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한 도시입니다. 원폭 돔은 무너진 채로 서서 과거를 증언하지만, 그 주변에는 생명이 넘치는 평화 공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히로시마가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파괴 후에도 재생은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그런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FAQ

Q1: 원폭 투하가 정말로 수백만 명을 구했나요? 이것은 사후 정당화 아닌가요?

A1: 이는 역사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트루먼 행정부는 본토 침공 시 미군 100만 명 사상을 예상했다고 주장했지만, 1945년 당시 합동참모본부 문서는 19만 3,5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100만 명 수치가 전후에 부풀려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의 사상률(미군 35%, 일본군 98%, 민간인 30%)을 본토에 적용하면 엄청난 희생이 예상됩니다. 일본 정부는 “1억 총옥쇄”를 준비했고, 민간인 2,800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또한 계속된 봉쇄와 폭격으로 인한 기아 사망자도 수백만이 예상되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히로시마·나가사키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것이 원폭 투하를 자동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Q2: 일본은 왜 히로시마 후 즉시 항복하지 않고 나가사키까지 맞았나요?

A2: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첫째, 일본 지도부는 히로시마 피해 규모를 즉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통신이 두절되고 정확한 정보가 없었습니다. 둘째, 일부는 미국이 원폭을 하나만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셋째, 8월 8일 소련 참전이 더 큰 충격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지도부의 분열입니다. 군부는 “국체 호지”(천황제 유지)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고, 평화파는 항복을 원했지만 조건을 놓고 대립했습니다.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과 소련 참전이라는 이중 충격 후에도 각료회의는 3:3으로 갈렸고, 천황의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미국이 소련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서둘러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고 주장합니다. 3일이라는 간격은 일본이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하기에 너무 짧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Q3: 핵무기가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는 주장은 타당한가요?

A3: “핵 평화(nuclear peace)” 이론은 일정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1945년 이후 핵보유국 간 직접 전쟁은 없었고, 유럽에서 75년간 대전쟁이 없었던 것은 역사상 이례적입니다. 냉전 시대 미소가 여러 차례 충돌 직전까지 갔지만, 핵전쟁 공포가 자제를 강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평화입니다. 대리전쟁(한국,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으로 수백만이 죽었고, 핵 위기(쿠바, 1983년 오류 경보)는 인류를 벼랑 끝으로 몰았습니다. 또한 인도-파키스탄처럼 핵보유국 간 재래식 충돌(카르길 전쟁)도 발생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미래입니다. 핵무기가 많아질수록 사고나 오판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비국가 행위자의 핵 테러 위험도 있습니다. 핵무기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것은 위험한 도박입니다. 역사학자 E.P. 톰슨은 이를 “극단론으로 무장한 평화”라고 비판했습니다. 핵무기는 전쟁을 억지했을 수도 있지만, 한 번의 실패가 문명을 끝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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